종이와 펜

아이와 대화하는 법, 제가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끄덕

지난 글에서 종이 체크리스트를 태블릿으로 옮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글 주간 계획표가 잘 되니까 종이가 모자랐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게 되자 할 일을 늘리고 싶어졌고, 그 순간 A4 한 장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2편에 실었던 화이트보드 사진을 다시 꺼내야겠습니다. 체크리스트가 자석으로 붙어 있고 옆에 「배스킨 쿠폰 1장 / 9천800원」이 적혀 있던 판입니다.

방문에 테이프로 붙어 있던 체크리스트 자리에 그 판을 걸면서, 한꺼번에 세 가지가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체크리스트, 하트와 잔고를 적는 장부, 그리고 이 글이 다룰 세 번째 — 포스트잇입니다.

앞의 둘은 이미 적었으니, 이 글은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건 체크리스트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날

둘째를 훈육하던 날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변명이든 항의든 뭐라도 했을 텐데, 그날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반성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억울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소리 할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말을 안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빠 말이 맞지 않을까 생각했어. 아빠는 어른이니까."

이틀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아이가 말을 못 한 것이 아니라 말할 필요를 못 느낀 것입니다. 어른이 하는 말은 어차피 맞는 말일 테니까요. 그 판단을 아이가 스스로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동안 제가 아이 말을 어떻게 받아 왔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듣지 않았던 자리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마주 앉는 것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방법을 여러 가지 생각했습니다.

마주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까. 그런데 그 자리에서 결국 말을 많이 하는 쪽은 저일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또 듣고만 있을 겁니다. 자리만 바뀌고 구도는 그대로입니다.

공원을 걸으며 이야기해 볼까. 이건 더 위험해 보였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제가 하게 될 말은 아마 변명이었을 겁니다. "아빠도 그때 이래서 그랬어." 그러면 아이는 자기 말을 하러 나갔다가 제 사정을 듣고 돌아옵니다.

문제는 자리가 아니라 구도였습니다. 제가 입을 열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조건을 뒤집었습니다.

아이 쪽에서만 말하고, 나는 듣기만 하는 방법.

말을 주고받지 않는 방법이어야 했습니다. 한 방향이어야 했습니다.

작은 소통이 시작되었습니다

화이트보드를 걸면서 아이들에게 한 가지를 더 말했습니다.

엄마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여기에 적어 둬.

처음 대부분은 작은 장난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쓰는 말이니 당연합니다. 그런데 글과 포스트잇 사이에 이런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내일은 꼭 놀러 나가야 돼"

비가 온다고, 덥다고, 오늘은 집에서 쉬자고 했던 것이 저였습니다.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매번 다른 이유가 붙었지만 결과는 늘 같았습니다.

마주 앉아 물었으면 절대 안 나왔을 말입니다. "요즘 아빠한테 서운한 거 있어?"라고 물었다면 아이는 없다고 했을 겁니다. 그게 아이가 아는 정답이니까요. 어른이 물으면 어른이 원하는 답이 나옵니다.

태블릿 안에도 화이트보드를 넣었습니다

만들면서 이런저런 기능을 고민했지만, 이건 고민할 것이 없었습니다. 넣어야 했습니다.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을 자리가 없는 화면이라면, 그건 할 일만 시키는 화면입니다.

태블릿 화면에 뜬 화이트보드 창. 위에 '하고 싶은 말을 쪽지에 써서 붙여요!'라고 적혀 있고, 쪽지를 쓰는 칸과 노랑·분홍·하늘·초록·주황 다섯 가지 색을 고르는 동그라미, 붙이기 단추가 있다. 아래에는 붙어 있는 쪽지 세 장이 보이고 작성자 이름은 가림 처리되어 있다.
방문 앞에 걸어 둔 판을 화면 안으로 옮긴 것입니다. 쪽지도 색을 고를 수 있게 했습니다.

옮기면서 지킨 것은 하나입니다. 모양을 그대로 두는 것. 쪽지를 쓰고, 색을 고르고, 붙입니다. 댓글도, 읽음 표시도, 알림도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붙는 순간 그 판은 다시 대화하는 자리가 되고, 대화가 되면 어른이 이깁니다.

그대로 해보려면

화이트보드와 포스트잇이면 됩니다. 앱도, 정해진 시간도 필요 없습니다.

  1. 자리는 매일 지나는 곳에 둡니다. 방문 앞, 냉장고, 현관. 마음먹고 가야 하는 자리에 두면 마음먹었을 때만 씁니다.
  2. 주제를 정해 주지 마세요. "오늘 기분 어땠는지 적어 봐"는 숙제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면 충분합니다.
  3. 읽고 나서 곧바로 대꾸하지 마세요. 특히 해명하지 마세요. 적어 둔 말에 어른의 답이 따라붙는 순간, 그 판은 다시 대화하는 자리가 되고 대화에서는 어른이 이깁니다.
  4. 대신 행동으로 답합니다. 놀러 나가자고 적혀 있으면 나가면 됩니다. 그게 "읽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이고, 아이는 다음에 또 적습니다.
  5. 장난이 대부분이어도 그냥 두세요. 장난을 걸러내려 하면 판이 진지해지고, 진지해지면 아무도 안 씁니다. 진심은 장난 사이에 섞여서 옵니다.

3번이 제일 어렵습니다. 저도 처음에 "그날은 비가 왔잖아"라고 말할 뻔했습니다. 그 한마디를 참는 것이 이 판을 유지하는 값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이트보드에는 매주 지워도 되는 것들 사이에, 지우면 안 되는 두 줄이 있었습니다.

다음 글 지우면 안 되는 두 줄이 앱이 됐습니다 산 쿠폰을 주말에 못 쓰면 화이트보드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 두 줄을 지키려고 지갑을 만들었고, 엄마 쿠폰은 쇼핑몰이 됐습니다.